문화과학 2011년 봄호에 실린 장정일의 조영일 비판. 
좀 길지만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장정일의 블로그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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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평이란 ‘텍스트’를 읽는 것 

 

  조영일의「우익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장정일의 고독에 대하여」(이하 「우익은 어디에」 )는 원래 장정일이 쓴 『구월의 이틀』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작성되어 그의 사이트에 올려졌고, 그것을 다듬은 게 『문화과학』2010년 봄호에 실은 동명의 글이다.『문화과학』에서는 이 글을 ‘문화비평’으로 분류해 놓았지만, 문제의 글은 나에 대한 폭넓은 작가론도 아니고, 『구월의 이틀』에 의해 촉발된 두루뭉실한 시론도 아닌,『구월의 이틀』에 대한 서평이다. 조영일은 『구월의 이틀』을 빌어 일종의 작가론을 시도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우익은 어디에」는 작가론이 갖추어야 할 조건에 미달하는 글임을 미리 못박아 둔다.
 

  성실히든, 면밀히든, 철저히든, 문학 비평가가 행하기로 한 서평의 기본은 당연 대상 작품에 대한 이해다. 서평자의 역량이란, 그 이해 위에 작가가 쓴 또 다른 작품과의 연관이나 변화를 살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글은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일차적 이해에도 가닿지 못했던, 자의적인 감상문에 지나지 않는다.
 

  「우익은 어디에」는 『구월의 이틀』을 전적으로 ‘우익청년 탄생기(일대기․성장기)’란 시각으로 읽은 오독의 산물이다. 물론 그렇게 읽게 된 데에는 본문 뒤에 붙은 ‘작가 후기’ 탓이 크니, 작가의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작가 후기가 내 자의로 쓰인 게 아니니 작품의 사용설명서로는 부적당하다는 것을 조영일은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했고, 실제로 「우익은 어디에」에 그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출판사의 강력한 요청으로 마땅치 않은 후기를 쓴 다음, ‘작가 후기 - 겉’이라고 써 보냈다. ‘겉’이라고 덧붙여야 했던 이유는, 속내가 따로 있다는 뜻이었는데, 출간된 책에서는 그 단어가 사라졌다. 그러나 이런 여담이 아니더라도, 명민한 비평가는 작가의 군말에 괘의치 않을 것이다.
 

  작가 후기에서 유추된 것이든, 아니면 서평자의 고유한 독해에 따랐든, 「우익은 어디에 」는 제목에서부터, 조영일이 저 소설을 우익청년 탄생기로 읽었다는 것을 증빙하고 있다. 그렇다면 ⅰ) 과연 저 소설은 조영일이 간주한 것처럼 우익청년 탄생기인가? 또 ⅱ) 작가의 항변을 무시하고 얼마든지 우익청년 탄생기로 저 소설을 읽을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비평가의 우익에 대한 이해는 어떤 것이며,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내 우익청년 탄생기에 대한 평가는 타당했는가? 그리고 ⅰ), ⅱ)에서 서평자의 하자가 명백히 드러났다고 할 때, ⅲ) 그 간에 행해졌던 조영일의 비평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2. ‘동성애 코드’가 불필요하다고?

 

  작가는 본인이 쓴 작품의 작의와 거기에 따른 설계도를 비평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ⅰ)에 대한 설명은 ‘제 논에 물대기’처럼 쉽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비평가의 오독을 밝히는 건 매우 쑥스러울 뿐 아니라, 역으로 생각하면 독자가 그걸 알 수 없을 만큼 주제를 제대로 형상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서평가의 오독을 밝히는 게 나의 숙제이므로, 두루 독자의 양해를 바란다.

  조영일은 『구월의 이틀』이 “어느 곳 하나 만족스러운 데가 없는 작품이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을 잇는다.

 

  ‘우익청년의 탄생기’를 공언하면서 쓸데없는 성애묘사에 많은 지면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동성애 코드를 전면에 배치하여 정작 말해야 할 것을 서술할 지면은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의심까지 일게 만든다. 즉 문득 자신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음을 발견하고, 기존에 즐겨 사용하던 아이템(코드)들로 대부분의 원고지를 억지로 메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문화과학』,2010년 봄호, 222쪽. 앞으로는 쪽수만 표시)

 

  조영일은『구월의 이틀』이 “쓸데없는 성애묘사”와 “불필요한 동성애 코드”를 전면 배치해서 작가가 공언(?)했던 ‘우익청년 탄생기(일대기)’를 망쳐 놓았으며, 공언과 달리 우익 청년 일대기란 무거운 주제를 감당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용된 저 대목을 보면, 서평자가 나의 작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쓸데없는 성애묘사”가 지면을 낭비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물론 작중의 성애 묘사 과다는 독자마다 다르게 판단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서평자는 ‘아니면 말고’식의 느낌이 아니라 구체적인 분석을 동반해야 한다. 구체적인 분석도 없이 손쉽게 저질러지는 ‘쓸데없는 성애묘사 운운’하는 비평적 폭언은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나 같다. 나는 분석을 동반하지 못하는 조영일의 저런 간투사가 그의 비평에서 영영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지만, 당부컨대 조영일은 앞으로 이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입증도 못할 ‘쓸데없는 성애묘사’보다, “불필요한 동성애 코드”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저 난독가의 단언과 달리, 이 작품의 전면에 배치된 ‘동성애 코드’는 불필요한 게 아니라, 이 작품의 중요한 주제다. 우익청년 탄생기라는 이 작품의 두드러지는 외면적 특징은, 동성애 코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구월의 이틀』을 펼치면 서두에, 훗날 서울의 같은 대학교에서 만나게 될 광주 출신 주인공 금과 부산 출신 주인공 은이 소개된다. 이때 나는, 두 사람을 작품 서두에 소개하면서, 작심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소설의 주제를 숨겨 놓았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숨겨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금과 은의 첫 인상은 아래와 같이 제시된다. 

 

  금의 경우,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서울 구경을 했다. 6인조로 구성된 유명 아이들 그룹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 친구들과 함께 서울행 고속버스를 탄 후로, 금은 친구들과 함께 또는 혼자서 6인조 아이들 그룹의 공연장을 찾아다녔다.(8쪽)

 

  [은은] 뭣보다 금으로 도금된 것 같은 서울 사람들의 말씨가 듣기 싫었다. 텔레비전을 켜면 늘 듣는 게 서울말이었지만, 그걸 육성으로 듣는 것은 또 달랐다. 은연중에라도 은은자신의 고향에 대해서 특별한 자긍심을 품어본 적이 없고, 경상도 사투리에 애착을 가진 적은 더더욱 없다. 그런데도 서울 남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여성스러운 억양은 아무 이유 없이 은을 긴장시키고 역겹게 했다.(10쪽)

 

  금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쫒아 다닌 6인조 아이들 그룹(idol group)은 여성 그룹이 아니었다. 8~9쪽에 걸쳐 금이 쫓아다닌 아이들 그룹이 묘사되고 있지만, 독자들은 금으로부터 일반적인 남학생이 여성 아이들 그룹에게 보이는 반응을 전혀 볼 수 없다. 이처럼 나는 금이 좋아서 쫒아 다니는 아이들 그룹을 남성 그룹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인간은 모두 잠재적인 양성애자라는 것을 암시하고 싶었다. 지배적인 이성애 문화와 동성애를 억압하는 여러 기제들이 동시에 옅어질 때, 잠재된 양성애는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한편 은은 서울 남자들의 간드러진, 여성적인 말씨에서 ‘긴장’과 ‘역겨움’까지 느낀다. 실제로 은과 같은 경상도 남자들은, 서울 남자들의 말씨에 ‘닭살’이 돋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처럼 긴장과 역겨움까지 느낄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자신 속에 깃든 ‘여성성’이 두려워서이다. 장차 여성이 되어갈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억압하기 위한 과잉 방어가, 서울 남자들의 여성스러운 말씨를 들을 때마다 긴장과 역겨움으로 나타난 것이다.
 

  소설은 잠재적인 양성애를 간직하고 있으나 이성애 쪽으로 물고를 틀 수 있었던 금과, 자기 속의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홀로 분투해야 했던 은의 행로를 따라 진행된다. 자기 속의 여성을 억누르고 남성 정체성을 고수하고자 하는 은은 제일 먼저 국어 선생으로부터 찬사 받은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버리고(‘시인’은 약한 남성이거나, 여성스러운 것이니까), 뒤틀린 엘리트 의식으로 자신의 갑주를 만든다. 그러다가 종내는 자신의 여성적 기질을 억압하고 은닉하기 위해 ‘강한 것이 선’이라는 우익 이데올로기와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연상의 여자에게 성적으로 이용당한 끝에, 사랑과 섹스 모두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오해하는 것처럼, 금과 은이 ‘동성 섹스’를 나누었다고 해서, 두 사람이 ‘동성애’에 빠진 것은 아니다. 은 입장에서는 금과 동성 연인이 되는 것을 원했지만, 연상의 여인에게 배반당하고 그녀를 잊지 못하는 금에게 은과의 섹스는 일시적인 도피였다. 동성애 이론은 이런 경우를 ‘기회주의적 동성애’로 분류하는데, 기회주의적 동성애는 프리 섹스주의자에게 더 많은 기회가 열려 있다고 한다(금은 연상의 여인에게 ‘프리 섹스’를 배운 거나 마찬가지다).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된『구월의 이틀』의 마지막 장(10장)은 ‘새로운 성장소설’이란 소제목을 달고 있다. 이 장에서 금을 모델로 발탁하기로 한 의류 쇼핑몰의 남자 사장은 이런 말로 금을 유혹한다. 

 

  열아홉이라고 했지? 좋은 나이야. 나도 금과 같은 젊음을 지나왔어. 그런데 내가 젊었던 시대와 금이 젊음을 누리고 있는 이 시대는 크게 다른 게 있어. 바로 내 시대에는 유혹이란 게 단순했어. 남자는 여자를 유혹하고, 여자는 남자를 유혹하는 거였지. 그런데 너희 세대가 대면할 상황은 아주 복잡하지. 여자든 남자든 자신이 여자를 유혹할지 남자를 유혹할지부터 정해야 해. 마찬가지로 내가 여자에게 유혹당하는 게 행복한지, 남자에게 유혹당하는 게 더 행복할지도 정해야 해. 그게 너희 세대야.(285쪽) 

 

  최초의 로망스가 생긴 이래로 모든 연애나 성장 소설은 남자가 여자를 찾고, 여자는 남자를 찾는 얘기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던 것처럼, 지배적인 이성애 문화와 동성애를 억압하는 여러 기제들이 점차 허물지는 지금, 춘향은 이도령을 찾고 로미오는 줄리엣을 찾는 천편일률적인 성장소설은 이제 끝나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내게 있었다. 이 대목에 덧붙일 말은, 모든 인간이 잠재적 동성애자라고 해서 누구나 다 동성애자가 되는 건 아니란 것, 다만 이런 가능성들이 미래 세대에겐 더욱 열려져 있다는 것이다.
 

  조영일의 “불필요한 동성애 코드” 운운은 집필의 의도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던 때문에 내가 당하게 된 횡액이겠지만, 동성애 코드는 조영일의 말처럼 불필요한 게 아니라, 은의 정치적 선택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은이 자기 속의 여성을 우익 엘리티즘으로 치환하고, 파시스트나 다름없는 우익 엘리티즘 속에 자신의 동성애를 은닉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작중의 동성애 코드는 이후 우익청년으로 자라는 은의 행로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지 결코 따로 겉도는 게 아니다.
 

  본인의 입으로 자기 작품을 얘기하려니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솔직히 말해 어느 곳 하나 만족스러운 데가 없는 작품”(222쪽)이라고 호기를 부린 조영일에게, 어느 곳 하나 제대로 읽은 데가 없다고 말해주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제목이 그렇듯이, 내용과 구성이 모두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있다. 또 모든 일화는 두 번 반복(변주)되며, 이질적이었던 주인공들은 서로의 입장을 바꾼다. 다시 말해 감상할 구석이 꽤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이 ‘국민작가’를 축수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독자들도 있다. 게다가 요즘 조영일이 쓰고 있는 국민작가에 대한 잡담 역시『구월의 이틀』에서 문제의식을 빌어온 것으로 판단되어, 잠시 그 문제를 해명하고 싶다. 독자들의 오독과 달리 아이러니로 세공된 『구월의 이틀』은 금을 국민작가로 축수하고 있지 않다. 작품 전체에 걸쳐서 어리석은 금은 은으로부터 무수하게 많은 사항을 배우고 깨우치게 되는데, 미래의 국민작가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조롱은 소설이 이미 끝난 에필로그에 나온다. 거기서 금은 서울역까지 배웅을 나온 은으로부터 “넌 이거 고쳐야 해”(329쪽)라는 마지막 지도편달을 받았다.
 

  독자들은 금의 독백으로 끝나는 이 작품의 마지막 문단을 보고, 마치 내가 미래의 국민작가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듯이 여기는 데, 그건 오독 가운데 오독이다. 원래 정치가가 되고자 정치학과에 입학한 금은 정치가였던 아버지가 자살했던 자리(현실)를 지키지 못하고, 문학이란 내면 풍경으로 도피하는 중이다. 그건 이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처럼 국민작가의 탄생은 비루했다. 

 

  3. ‘우익청년 탄생기’라고 치더라도 

 

  조영일이 『구월의 이틀』을 잘못 읽었다는 사실을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그는 작가가 애써 장(章)의 제목으로까지 달아 놓은 동성애 코드를 읽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이 소설을 ‘우익청년 탄생기’로 읽는 것을 굳이 막지 않는다. 문제는 그가 그런 관점으로라도 제대로 작품을 읽었느냐이다.
 

  그것을 검토하기 이전에, 여기서도 먼저 꼭뒤를 짚어야 할 사항이 있다. 그는 앞서 인용했던 극히 인상주의적인 총평에 이어, 나의 창작동기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보겠다면서 “장정일은 이 소설을 통해 한국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진 건전한 우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222쪽)고 운을 뗀다. 하지만 벌써 말했듯이 나의 작가 후기로부터 유추했을 게 뻔한 서평자의 전제가, 애초부터 단추를 잘못 꿰었다.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조영일이 생각하는 그런 창작동기를 가진 바가 없다. 실제로 나의 작가 후기와 그가 말하는 ‘철학을 가진 건전한 우익’이라는 은의 모습은 일절 합치하지 않으며, 오히려 나의 작가 후기가 은은 물론이고 스스로 철학을 가진 건전한 우익이라고 자처해 왔던 우리나라의 우익 인사를 조롱하고 있다는 것은 일반 독자들도 간파하고 있다. 은과 그 주위의 우익 인사들의 광태를 실컷 즐기고 난 독자들 가운데는, ‘장정일이 철학을 가진 건전한 우익을 애써 그려보고자 했는데, 끝내 그런 우익이란 찾을 수 없었던 게, 이 소설의 결론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독자들의 이런 반응은, 내가 구축했던 아이러니의 결과다.
 

  그런데 조영일은 저 혼자서, 내가 진짜로 “아직 존재하지 않은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진 건전한 우익”을 그리고자 고투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즉 장정일은 스스로 ‘건전한 우익’(주인공 은)에 대한 희망을 가진다고 말하지만, 독자들은 도리어 그것을 우익(꼴통우익이든 건전한 우익이든)에 대한 조롱으로 독해하곤 하는데, 이는 해석적 다양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작가 스스로가 형상화과정에서 빠진 혼란이 독자 쪽에서 발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의도의 오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224쪽)

 

  『구월의 이틀』을 읽은 대다수 독자들은 작가 후기에 현혹되지 않고, 작가의 날선 아이러니를 이해했다. 즉 철학을 가진 건전한 우익을 그려보겠다면서 사이코들을 형상화한 나의 진짜 창작동기를 눈치 채고 즐긴 것이다. 여기서 ‘의도의 오류(작가 후기)’에 계속 투신하는 것은 조영일 뿐이다.
 

  꼭뒤 짚고, 세부로 들어간다. 나는 이 소설에서 소위 국가를 통치한다는 엘리트(위정자)들이 현교밀교론(顯敎密敎論)을 사용하여 대중을 호도한다고 썼다. 그런데 조영일은 그 대목이 나온 소설의 273~274쪽을 인용해 놓고 나서 이렇게 논평을 한다. 

 

  도대체 오늘날 어느 누가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이라크를 침공했다고 생각하는가? 초등학생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는 매우 적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도리어 그 이유가 석유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엘리트들이 밀교라는 것이 겨우 이라크 전쟁의 원인이 석유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면, 그들은 엘리트라기보다는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보는 편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장정일이 계속해서 말하는 ‘꼴통 우익’과 ‘건전한 우익’의 차이가 도대체 뭔지 잘 모르겠다.(223쪽)

 

  서평자는 현교밀교의 현실적 위력을 정말 잘 모르는 모양이다. 지면이 무한정하지 않으니 논의를 줄이기 위해 구노 오사무․쓰루미 슌스케의 『일본 근대 사상사』(문학과지성사,1994) 4장 2절과 박성래의『레오 스트라우스』(김영사,2005)부터 읽기를 권한다.
 

  현교밀교론에서 말하는 엘리트들의 밀교는 먼저 ‘세상에 진리가 없다는 것을 대중들이 모르게 하라(밀교)’를 뜻하며, 그 다음 수순은 당연하게도 ‘대중들에게 조작된 진리를 세뇌하는 것(현교)’이다. 부시의 이라크 전쟁은 딱 그 식으로 진행됐다. 네오콘의 진의는 ‘석유(진리가 없다!)’였지만, 미국민이나 참전국을 향해서는 ‘이라크의 민주주의화(조작된 진리!)’를 말했다.
 

  조영일은 저런 뻔한 속임수에 누가 넘어가냐면서, 초등학생도 저 뻔한 수를 안다고 말한다. 임금님이 벌거숭이라는 것을 어린 아이만 알았듯이, 조영일 말처럼 네오콘의 속셈을 초등학생은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현실은 조영일의 희망적 사고와 아주 다르다. 그는 동서고금의 모든 위정자들이 단골로 사용해 온 현교밀교론의 위력을 아직 모른다. 이라크 전쟁의 경우가 그러했다. 이라크에 있다는 대량살상무기 공장이 거짓이라는 게 밝혀지고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자행된 미군의 포로학대가 밝혀지면서야 미국의 여론이 반 이라크전으로 돌아섰지, 개전 초기엔 부시의 ‘개구라’를 모두 믿었다.
 

  앞선 인용의 끄트머리에도 잠시 나왔지만, 조영일은 내가 “‘꼴통우익’과 ‘건전한 우익’이라는 구분에 집착하고 후자를 주제로 삼고 있”(224쪽)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아이러니를 제대로 읽지 못한 오독이다. 조영일 눈에는 은이 ‘건전한 우익’처럼 보이는 모양이지만, 자세히 보면 작중의 올드(Old)․뉴(New)․영라이트(Young Right)는 세대만 다를 뿐 이념상․전략상의 아무 차이가 없다.
 

  그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한국에도 건전한 우파가 필요하다’고 별생각 없이 말하는 경향”(230쪽)이 있다면서, 이명박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텅 빈 기표가 바로 ‘건전한 우파’라고 말한다. 그가 행하는 대부분의 해석이 그렇듯이 이 또한 조영일의 독창적인 해석은 아니다. 또 내 소설은 그런 텅 빈 기표와 아무 상관없기도 하지만, 어디서 빌려온 저런 해석에 동의하기도 어렵다. 나는 ‘건전한 우파’와 ‘가스통 우익’이 아무런 차이 없는, 한통속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소위 건전한 우파는 ‘가스통 우익’과 달리 가스통을 짊어지고 거리를 배회하지 않아도 되는 기득권자들이라는 차이 밖에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신념은 ‘가스통 우익’보다 더 극렬할 수 있다. 어쩌자고 내 재산을 아귀 같은 좌파에게 빼앗긴다는 말인가? 이게 내가 생각하는 건전한 우파다. 하므로 내 작품은 “‘꼴통우익’과 ‘건전한 우익’이라는 구분에 집착하고 후자를 주제로 삼고 있”지 않다.
 

  서평자는 자기 임의대로 『구월의 이틀』을 우익청년 탄생기로 읽어 보겠노라면서, 정작 자신의 우익에 대한 지식은 순진 소박하다. 조영일은 경상도 출신인 은이 우익 엘리트가 되는 것에 대해 “엘리트주의는 지역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인가?”(225쪽)라고 조소하기도 하고, “우익은 ‘엘리티즘’으로 단순히 치환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230쪽)고도 말하는데, 우선 엘리트주의는 탕평주의가 아니며 그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숙지해야 한다. 엘리트주의는 지연․학연과 같은 철통같은 연고로 코드화 되어 있다. 그 코드로부터 제외된 ‘정치 엘리트’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내 작품에서 말하는 엘리티즘의 요체는 ‘권력과 힘에 대한 숭상’이었고, 나는 그것을 우파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식민 시대의 상층 친일파와 권력 중심부에 있는 오늘날의 친미주의자는 장삼이사보다 더 약한 존재여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이 장을 맺기 전에 마지막으로 거론하고 싶은 게, 조영일의 한국 문학사와 역사에 대한 이해다. 그는 “한국문학이 이제까지 ‘좌익청년의 일대기’만 그려온 것은 건전한 상식과 철학을 갖춘 우익이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익청년의 일대기’를 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하자면, 진짜 원인은 좌익이 우익이 해야 할 역할까지 모두 도맡아 왔다는 데에 있다”(230쪽)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막무가내 우파(골통 우파)’는 ‘좌파의 아바타’였느니 뭐니하는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저 글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게 되듯이 그의 논의가 이처럼 추상적인 것은, 그의 사고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짜깁기 하는 일에만 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비약과 논점 이탈 투성이며 당연히 조영일은 “쉽게 말하자면”이 결코 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 번역 전문가에게 자신의 논리를 쉽게 번역해 주면, 소위 우리나라의 좌파(혹은 좌파 작가)들이 자신의 계급적 불철저성을 위장하기 위해 곧바로 ‘막무가내 우파(골통 우파)’만을 형상화 했기 때문에(건너 뛰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건전한 우익청년’은 실종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설명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와 문학사의 전개를 모르는 소치다. 저 설명은 좌파의 위선은 설명해 줄지 모르지만, 그동안 우파 작가나 우익작가들의 ‘우익청년 일대기’는 왜 나오지 못했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몇 차례나 설명했듯이, 한국은 일제시대에서 최근까지 좌파가 ‘정신적’으로 승리한 나라이다. 하므로 최근에서야 언죽번죽 ‘뉴라이트’를 자처하는 지식인과 작가들이 나오게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어디서 ‘내가 우파요’라고 말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런 행위는 자살행위나 같았다.
 

  바로 그 때문에 우익청년 일대기는 나올 수 없었으며, 치열했던 민주화(운동권)시대에 그런 소설이 팔릴 리도 만무했다. 그래서 우익 작가들은 우익청년 일대기를 그리기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으로 우회했다. 현재 스스로 우익 지성임을 자처하고, 또 실제로 극성스러운 우익이데올로거로 불리우는 이문열과 복거일이 각기 그들의 초기작과 등단작인『젊은 날의 초상』과 『비명을 찾아서』를 예술가 소설로 조탁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두 작품이 소설가와 시인의 탄생기로 마무리 된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가 좌파에 의해 정신적으로 점거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80년대라는 시대적 규정력에 따른 탓이지 좌파가 우파의 몫까지 독점했기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문열과 복거일같은 우파 의식의 소유자들만 시대적 규정력을 의식했던 것은 아니다. 80년대의 젊은 좌파 작가들도 탄압을 우회하기 위해서거나 운동 자체를 회피하기 위해 예술가 소설을 썼다. 우파 작가들의 예술가 소설이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나를 부른다’였다면(알다시피 이게 우파 미학이다), 좌파 작가들의 예술가 소설은 ‘더 큰 운동을 하기 위해 나는 쓰기로 했다’라는 동력에 따른다(나는 이런 태도에 일말의 현실 도피와 명망가적 욕망이 숨어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민주화(운동권) 시대에는 우파나 좌파들 모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비무장 지대에서 혼거했던 것이다. 여러 차례 밝혔지만,『구월의 이틀』 속의 금은 ‘더 큰 운동을 하기 위해 나는 쓴다’는 ‘좌파청년 일대기=예술가의 초상’을 희화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다. 

 

  4. 조영일의 비평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우익은 어디에」는 이렇게 시작한다. 

 

  몇 년 전 나는 한 학기 동안 모 여대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정말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장정일이 그 대학 문창과 초빙교수로 와있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장정일’과 ‘대학’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한 쌍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묘한 배신감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 착잡한 안타까움을 느꼈다.(219쪽)

 

  솔직히 저 서두를 보고 놀란 것은 나였다. 장정일이 모 여대에 출강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왜 깜짝 놀랐다가, 배반감까지 느끼게 된 걸까? 그게 그렇게 놀랍다면, 조영일 자신은 왜 대학을 기웃거리는데? 소설가는 굶주린 창자를 껴안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자기 책상에 웅크리고 앉아 글쓰기에 헌신해야 옳고, 비평가는 자신의 펜을 날카롭게 벼리기 위해 상아탑에 자리를 차지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어느 누가 말했다는 말인가?
 

  모 여대 복도에서 소설가 장정일과 평론가 조영일이 우연히 부딪쳤다면, 소설가는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숙여야 했고 평론가는 고개를 치켜들었어야 한다고 그는 믿는 걸까? 대학은 시장 직거래를 해야 하는 소설가의 창조력을 좀먹지만, 시장 직거래를 틀 수 없는 비평가는 대학에 안주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그는 변명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냈던 두 권의 평론집에서, 그는 입이 아프도록 ‘근대 문학 제도’를 비난하지 않았던가? 하므로 대학이 평론가를 먹여 살리게 된 근대 문학 제도와 거기에 빌붙은 자신의 표리부동에 대해 깜짝 놀라는 게 논리적으로 맞다.
 

  또 그는 두 권의 평론집에서 게거품을 물고 ‘문창과 문학’과 ‘국문과 문학’을 비난했다. 하므로 조영일은 앞으로 대학에 들어갈 생각을 말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청탁을 받고 써 모은 해설 모음집으로 비평가 노릇을 할 생각이 없으며, ‘전작평론’에 매진하는 비평가가 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럴 작정이면 당장 ‘보따리 장사’부터 집어 치우라. 그러면서 언제 제대로 된 전작평론을 쓴다는 말인가?
 

  어이가 없어서, 그가 썼다는 두 권의 평론집을 차례대로 읽어 보았다(이 글에서 행여 그의 평론집을 인용을 하게 된다면, 아예 책 제목과 쪽수는 쓰지 않겠다). 나는 두 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나서 ‘이건 비평이 아니다’고 결론 내렸다. 그가 쓴 것은 비평이 아니라 ‘입담’에 지나지 않았다. 모두들 알고 있고, 그 누구보다 조영일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듯이 입담은 비평과 다르다. 우선 입담은 자기 확신의 산물이다. 그래서 자기 객관화를 모른다. 입담은 오로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없는 차이도 만들어 내고, 미세한 차이도 크게 벌려 놓으려고 한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으면 애초부터 자기 확신이 생겨나지 않는다. 반대로 비평은 언제나 탈 주관화 작업이다. 결론에 가서 ‘타자의 이해 불가능’에 손을 들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론적으로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 없이 비평은 한 줄도 씌어지지 않는다. 비평은 없는 격절을 유도하는 입담과 달리, 너와 나의 격절을 미세하게 좁히려는 노력이다. 비평은 격차를 짓는 게 아니라 미세하게 되는 것이요, 그래서 인간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비평가는 자신이 대상으로 삼은 텍스트나 작가 위에 서는 게 아니라, 옆에 서게 된다. 바로 이것이 자기중심적인 비평도, 자기확신의 산물인 입담도 아닌, 탈 주관화로 당당해진 비평의 참 모습이다.
 

  앞서 ‘모 여대 출강 일화’에서 보았듯이, 없는 차이도 만들어내는 조영일은 전형적인 입담가다. 먹고 싶은 입과 말하고 싶은 입을 가졌다는 점에서 대학 강의실 복도에서 만난 소설가와 비평가가 무슨 큰 차이를 가졌다는 말인가? 없는 차이는 조작하고 미세한 차이는 과장하는 조영일의 전형적인 입담 사례를 두 개 더 소개한다.
 

  먼저, 자신의 작업이 권성우․이명원등이 행했던 ‘문학권력비판’에 빚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강변이 그렇다. 하지만 그의 강변과 달리 그가 쓴 두 권의 책은 ‘문단문학’과 ‘문단시스템’을 비판하는 일에 온통 바쳐져 있다. 한국문학의 문제는 무조건하고 문단문학과 문단시스템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영일의 원래 취지는 ‘네이션-내-문학’과 공생하고 있는 문단문학과 문단시스템을 동시에 비판하는 것이었지만(‘문단문학=네이션-내-문학’), 실제로 이루어진 작업의 양이나 논지는 모두 문단문학과 문단시스템에 관한 비판 일색이다. 그러면서 “나는 문단 비판이나 문학권력비판에는 처음부터 관심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침을 튀긴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문단권력비판 속에는 대형출판사․편집동인(문예지)․평론가(주례사 평론)․주류 언론에서부터 국가의 문학 지원책 까지, 현재 조영일이 문제 삼는 모든 사안이 망라 되어 있다. 조영일은 문단권력비판이 ‘네이션-내-문학’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출발선부터 달랐다고 말하겠지만, 문제의식을 서로 공유하지 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사소한 차이를 크게 만들어야만 ‘뻥’을 칠 수 있는 입담가의 두 번째 강변. 조영일은 우리나라 문학의 문제가 문단문학의 문제며, 그가 말하는 문단문학은 ‘에꼴’이 사라졌는데도 동인 행세를 하고 있는 대형 출판사와 문예지의 상술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그는 대형 출판사에 소속된 “비평가들이 모두 국문과 출신”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대학에서 국문과를 나온 그들이야말로 ‘근대 문학 제도’의 수혜자들이며 그들이 문단문학을 ‘내이션-내-문학’으로 만들기 때문에 조영일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일 먼저 ‘한국문학’이라는 허상을 생산해내는 한국문학시스템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의 유지․연장에만 골몰하는 ‘네이션-내-비평’(국문학전공자에 의해, 국문학시스템을 위한, 국문학의 비평)을 우선적으로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영일이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은, 두 가지로 흥미롭다. 하나는 그 자신이 국문과 출신이라는 것(저 비판에서 조영일은 자신을 어디에 기입하고 있을까?) 둘, 그런데도 자신은 국문과 출신이라는 게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네이션-내-비평’을 거부하는 특출 난 비평가라는 것이다. 그가 이런 나르시시즘에 푹 빠져버린 근거는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열심히 번역하고, 또 우리나라의 비평가는 한국문학이라는 테두리에 만족하며 ‘한국문학비평가’ 노릇을 하고 있을 때 자신은 외국문학도 읽고 거기에 대한 독후감을 자신의 블로그에 따금따금 올린다는 것!
 

  말이 나온 것처럼 그는 가라타니 고진의 전문 번역자다. 가라타니는『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1997)으로 우리나라에서 평판을 얻었지만, 그의 유명세는 ‘근대문학의 종언’이 결정적이다. 가라타니는 같은 제목의 논문에서, 근대 문학의 눈부신 성공과 영광은 ‘네이션 만들기’와 상관있으며 그 임무가 끝난 지금 ‘근대 문학은 죽었다’고 주장한다. 이 요약에 몇몇 세부를 더 부가할 수는 있겠지만, 상술한 전제는 변동이 없다. 그런데 조영일은 가라타니 의 주장을 광신하는 한편, 모순되게도 우리나라에서 문단문학만 없어지면 문학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고 혹세무민(?)한다. “나는 한국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끝났다고 보는 것은 ‘한국의 문단문학’이다”같은 언급이 그렇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논리에 충실하자면, 한국의 문단문학이 바람직하게 변하거나 해소되더라도, 이미 종언한 근대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이 살아날 일은 없다. 종언론에 대한 이런 불철저함이야말로, 그의 평론집이 기존의 문학권력비판의 자장 속에 있거나 연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준다.
 

  누구나 다 수긍하듯이, 조영일의 문단문학이나 문단시스템 공격은 가라타니를 ‘빽’ 삼아, 호가호위하는 본새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기로 가라타니는 문학을 떠난 지 오래고, 언제부터인가 문학 비평을 전혀 하지 않는다. 비약이지만 가라타니라는 인물은『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이라는 책을 쓸 때조차도, 과연 문학비평가라는 입각점에 서있었던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실제로 그는 저 책의 후기에 “이 책은 제목이 나타내는 것 같은 ‘문학사’는 아니다”고 밝히고 있다.
 

  2003년에 발표된 가라타니의 논문「근대문학의 종언」은 인계철선으로 ‘근대(문학)비평의 종언’을 동시에 불붙인 것으로 회자된다. 조영일 역시 그런 관점을 받아들이는데, 내가 보기에 가라타니의 의식 속에서 저 논문은 ①근대‘문학’의 종언이 앞서고, ②근대‘비평’의 종언이 뒤따랐다는 식의 선후․인과가 있었던 게 아니라, ②근대‘비평’의 종언이 먼저 있었다. 최근에 읽은 사사키 아쓰시의 『현대일본사상』(을유문화사,2010)에 따르면, 가라타니는 ‘문예 비평=사상’이었던 일본의 사상 풍토 속에서, 가장 마지막에 선 비평가였다. 그가 뉴아카데미즘의 일원으로 활발한 비평을 할 때, 이미 그의 세대는 ‘작품=텍스트’라는 문예비평가적 도식과 ‘읽기’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비평 행위 속에서 문학적 인용을 차츰 지워간 세대로, ‘문예 비평=사상’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나 사회 비평으로 나갔다. 이와같은 가라타니의 행로와 의식 속에서는 근대‘비평’의 종언이 선행했으나, 곧바로 ②로 나가거나 ②를 표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문학비평의 운명 때문이다. 문학비평은 작품을 빛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비평가란 창작이라는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작가를 후방에서 지원하는 보조원에 불과하다. 하므로 ②보다는 ①을 먼저 선언해야 했고, 그러면 저절로 문학비평가의 임무에서도 풀려난다.
 

  문학비평 활동이라고는 고작 10여년 정도에 불과했던 가라타니의 경력 속에서 그가 발표한 「근대문학의 종언」은 더 넓은 비평의 지평(발판)을 얻기 위한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을 터다. 이처럼 종언론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가 놓여 있었던 당대의 일본 사상 풍토와 가라타니 자신의 전략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조영일은 그런 일본적 특수성과 한 문학비평가의 청산 의례를 무시한 채, 「근대문학의 종언」을 옆에 끼고 한국 문학을 겁박한다.
 

  이 문학 묵시론자에게 열려져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우선은 가라타니처럼 사상가의 길을 가는 것. 안 그래도 그는 요즘 그 흉내를 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걸 알아야 한다. 역사상 피번역자와 번역자의 능력이 동일했던 경우는 에드가 알란 포와 보들레르의 예처럼 희소했다. 나머지 경우엔 피번역자와 번역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지적․창조적 비대칭이 존재한다(번역자의 평범함이 번역을 감수한다). 그러니 조영일이 가라타니의 길을 가는 것은 지난하다고 해야 한다. 또 다른 길은 문학의 바깥에서 비문학적인 글쓰기를 옹호하거나, 뉴아카데미즘의 이후 일본 현대 사상의 정사(正史)를 계승했다는 아즈마 히로키처럼 ‘작품=텍스트’를 완전히 떠난 문화비평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성실한 에피고넨은 가장 나쁜 선택을 했다. 뜬금없이 장르문학과 세계문학의 전도사가 된 것이다. 근대문학이 일찌감치 종언한데다가, 문단문학도 끝나야 한다면서, 여전히 문학장 근처에 배회중인 구차한 알리바이를 꾸미고자 장르문학의 가치를 발굴하고, 장르문학 살리기에 나선다? 하지만 그가 살리고자 하는 장르문학은 애초부터 문학적인 전복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 상업문학으로 시작했고, ‘문학판의 베스’가 된지 오래다. 그런데도 조영일은 단지 그 장르문학이 문단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단문학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장르문학을 집적거리는 것 말고, 그가 몰두하는 또 다른 관심사는 세계문학이다. 자신의 사유와 빌려온 사유를 전혀 구분하지 않는 이 에피고넨은 가라타니(칸트)의 세계공화국에서 강한 암시를 받았는지, 갑자기 ‘네이션-내-문학’의 종말로부터 세계문학의 가능성으로 비약한다. 이게 조영일의 활로인 듯하지만, 그가 세계문학 이념의 주창자로 고평하는 괴테의 세계문학론은 ①번역과 출판을 통한 국제 교류와 시장 형성 ②대중화에 따른 취향 하락을 막기 위한 국제적 연대 제안이라는 유럽적인 배경이 있었다.(김영희․유희석 『세계문학론』,창비,2010,14쪽) 저 가운데 ①을 강조하면 세계문학은 글로벌 경영에 나설 다국적 출판사와 영어 독재에 의해 완수될 공산이 크고, ②를 강조하게 되면 더 큰 규격화와 교양주의가 판을 치게 되고 거기에 조영일이 노심초사하는 주류 문단문학이 껴들게 되지나 않을지 우려된다(실제로 대형 출판사들은 교양을 내세워, 또 ‘한국 문학의 세계화’에 대한 포석으로 다투듯이 세계문학전집을 내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조영일은 괴테가 세계문학론을 꺼내 놓은 배경은 살피지 않고, 그가 써놓은 좋은 말만 갖고서 세계문학론을 구성한다.
 

  가라타니의 근대문학 종언론을 주기도문처럼 외우고 다니면서, 근대문학의 임무를 계속 떠벌이고 다니는 게 조영일이다. 그는 ‘문단문학=네이션-내-문학’을 극복하고 해체한다면서 앞서 거론했던 이념형으로서의 세계문학을 내세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세계문학 논의에는 근대문학에서 시효 만료된 계몽성․정치성․사회적 책임이 고스란히 주입돼 있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라타니가 종언론 이후의 세계문학을 구상하지 않은 것과는 상당히 다른 행보다. 가라타니가 근대문학 이후의 세계문학을 천작하지 않은 이유가 무척 궁금하긴 하지만, 조영일에 관해서 만큼은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문학적 중핵으로서의 ‘근대문학은 죽지 않았다’고 외치고 있는 그는, 청산되지 못한 근대문학의 잔여요, ‘폐비닐’이요, 좀비로 남아, 진정한 에피고넨이 되지 못한 자의 코미디를 보여주고 있다고!
 

  곁다리지만, 가라타니적인 의미에서의 근대문학은 거의 숨을 죽여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조영일의 모순이 보여주듯이 문학이 지닌 고유의 계몽성․정치성․사회적 책임은 사라지지 않으며 민족과 언어에 바탕한 개별 문학도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근대문학이 ‘문학’이란 대명사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근대문학의 종언이 ‘문학의 종언’으로 수리될 수도 없다. 조영일이 이 문제를 더 생각해 보고 싶다면, 조정환․정남영 등이 함께 쓴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갈무리,2007)을 읽고 내가 작성한 짧은 독후감을 단서삼아 찾아 읽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조영일에게 충고컨대, 비평을 하고 싶으면 문단문학과 비문단문학을 대립물로 나누는 갈 데 없는 관념론부터 지양해야 한다. 조영일이 말하는 문단문학/비문단문학은 그가 문학장을 떠나지 않고 어슬렁거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빌미요, 더 정확하게는 자기 환상이다. 문단문학과 비문단문학 혹은 주류와 비주류는 빗금(/)으로 구획되어 있는 게 아니라, 이접되어 있고 서로를 품고 있다. 그러므로 비평을 하려거든 자신을 문학장에 기입하라. 자신을 대상에 기입하지 않으면,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유령인 채, 소외된 불안을 극복하고자 염치없는 ‘신상 털기 전문가’가 된다. 

 

  ① 얼마 전 자유여행의 상징 윤대녕과 시대의 이단아 장정일이 모대학 교수 임용에 함께 지원했고, 그 결과는 윤대녕이 뽑혔다고 한다. 또 한 명의 ‘생계가 안정된’ 소설가의 탄생이다.

  ② 최근『밤은 노래한다』라는 장편소설을 출간한 김연수는 문단에서 가장 촉망받은 젊은 작가이다(이제 곧 중견작가가 되겠지만). 한때 김영하 ‘다음으로’(2인자로) 이야기되었지만, 어느 순간 그의 영향력은 김영하를 능가해 버린 것 같다. 이런 역전의 원인으로는 먼저 그럴듯한 작품을 써내지 못한 김영하 자신에게 있겠지만, 그보다는 작가로서 ‘성실함’, ‘진지함’, ‘겸손함’, ‘소탈함’이라는 이미지(김영하는 이러한 이미지보다는 ‘쿨함’, ‘댄디함’, ‘자신감’, ‘세련됨’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김연수 자신에게 있다 하겠다. 그를 직접 만나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고 한다. 문단 어른이나 선배가 보기에는 성실하고 겸손한 청년으로, 후배나 독자들에게는 마음씨 좋은 형이나 오빠로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그가 쓴 작품에 대한 평가에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 같다.

  ③ 소설가로서 박민규는 일견 반문학적 행위의 대표자(전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제스처를 취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반문학적 행위가 가진 '문학성'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문학에 대한 신뢰감은 자신의 창작 행위에 존재하는 '성실성'(그는 청탁을 펑크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에 대한 강조와 나란히 합니다. 문학계에도 마침내 주당들의 시대는 가고 샐러리맨의 시대가 온 셈입니다.

 

  ①은 사실 무근이다. 윤대녕 형과 나는 하나의 교수직을 놓고 경합한 적이 없다. ②는 그야말로 소설이다. 개나 소가 웃을 일이다. ③은 두 권의 평론집이 아니라 최근에 그가 모 인터넷 매체에 게재한 글이다. 여기서도 조영일의 흥신소적 감각은 빛을 발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입담은 자기 확신의 산물로, 스스로 자기 확신에 취하기 위해서 입담가는 온갖 소문과 유언비어마저 근거로 이용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상식적인 비평가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소문과 유언비어가 이 입담가에게는 글쓰기 동기가 되기도 하며, 논리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거기에 더해 그는 자신의 심증을 굳히기위해 아예 ‘신대’를 잡기도 한다. 이를 테면 “최원식이 서영채와 함께 드러낸 ‘문학의 종언’에 대한 거부감은 ‘종언론’ 자체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내심 그에 공감하고 있었으나 해당 담론의 헤게모니를 미처 장악하지 못한 이가 보이는 필요 이상의 ‘공격적 입장(자기부정)’으로 볼 수도 있다”같은 관심법이 그렇다.
 

  대립을 강조하고 차이를 강조하게 되면 자신은 점점 그 대상들로부터 멀어져, 어느 순간에는 대상들과 연관을 맺지 못하게 된다. 그가 주변으로부터 ‘문학이 끝났다면서, 뭐 하러 문학 주변에 얼쩡거리는데?’, ‘문단문학이 끝났다면서, 왜 글만 쓰면 주류 작가들에 대한 글만 쓰는데’라는 지청구를 듣는 까닭도, 자신과 대상을 너무 벌려 놓고 나니까 개입할 근거가 사라진 탓이다. 그래서 소외를 면하기 위해, 나도 현장(‘지금-여기’)에 있다는 실감을 위해, 작가들의 사생활을 염탐하듯 쓰게 된다. 그 순간 그는 좀비가 되어버린 자신의 소외와 불안을 잊고, 안도 하게 된다. 그의 고독이 깊어질수록 이런 증상은 더해 질 텐데, 조영일의 비평을 사비평(私批評)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그는 오늘도 입담을 푼다.

 

  5. ‘무지한 스승’ 이라고요? 입담가입니다.

 

  「우익은 어디에」는 『구월의 이틀』에 대한 서평임에도 불구하고 도합 다섯 개의 장 가운데 단 한 개의 장(제2장)만 작품 읽기에 할애된다. 비평가가 작품을 읽지 않고 작가의 활동 영역(곧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있으며, 어떤 평론가의 비호를 받고 있는가 등등)이나 신상 발언에 더 많은 공력을 쏟는 이런 가분수형 글꼴은 『구월의 이틀』만 아니라, 스스로 비평이라고 칭하는 그의 모든 글에 산견된다. 그의 비평이 예외 없이 이런 꼴에 낙착하고 마는 것은, 텍스트 읽기가 전혀 되지 않는 그의 고질 때문이기도 하고, 텍스트를 자신의 주관을 위한 들러리로 이용하는 악습 탓이다.
 

  그런데 저 서평에는 잘못된 작품 해석만 아니라, 작품 외적 논평에 있어서도 많은 허점을 노출한다. 그는 다짜고짜하고 “장정일은 『구월의 이틀』을 출간한 후에 가진 한 강연(한림대)에서”(225~226쪽)라고 신문에 나온 기사를 보고 시비를 건다. 여기서 그에게 먼저 일러두어야 할 점은, 신문기사는 기자가 전하고 싶은 것만 편집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나의 주장의 전모를 그는 알지 못한다. 앞으로 입담가는 이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신문기사를 본 그는 이렇게 쓴다. “장정일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빼면 영국문학의 절반이 날아간다고 주장하며, ‘시․소설 중심주의’의 한국문학을 비판하는데, 이는 특정 장르들에 대한 집중과 배제라는 편향된 문학관의 문제라기보다는 교육(학과)시스템의 문제이다.”(226쪽). 조영일이 본 신문은 기사를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나라 문학계나 독자들로부터 희곡이 천대 받는 것은 교육 시스템의 문제가 없지 않다고 평소부터 밝혀왔으며, 그런 생각의 한 자투리를 네 명의 작가들이 공동 출간했던 희곡집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이매진,2009)의 서문에 써놓았다. 그러니 조영일은 그 점을 오해할 필요가 없다.
 

  진짜 오해는 이어지는 부연인바, 그는 “실제 예술교육이 시스템으로 정착되기 이전에는 장르구분이 지금처럼 엄격하지 않았다”(227쪽)면서 여러 장르를 오갔던 식민치하의 작가들을 예로 든다. 하지만 근대 초기 우리나라 작가들 가운데 일부가 희곡을 쓰기도 한 것은 지금처럼 장르구분이 엄격하지 않았던 때문 이라기보다는, 그 시대엔 연설과 함께 연극이 유일한 대중 미디어였기 때문이다. 하므로 연극이 계몽의 도구였던 식민치하의 사정을, 오늘처럼 고착화된 예술교육 시스템과 비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하지만 그가 자꾸 ‘예술 교육 시스템’을 걸고 나오므로, 이쯤에서 조영일에게 심화학습을 시켜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왜 우리나라 교육(학과)시스템에서 시․소설은 우대되고 희곡은 배제되고 말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한․중․일 동양 삼국 가운데 우리나라의 연행예술은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노․교겐․가부키에 비해 빈약하기 짝이 없다. 조영일 말대로라면 그때도 오늘과 같은 교육(학과)시스템이 있었어야 했다. 또 다른 예는 조영일의 말처럼 우리나라 작가들 가운데 일부가 희곡을 쓰기도 했다던 그 시절, 중국에서 나온 희곡의 월등한 량과 질은 한국의 것과 아예 비교가 안 된다. 그 시절에 나온 중국 희곡은 소위 서구의 명작 희곡에 뒤지지 않는데, 과장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시절의 중국 작가 가운데 희곡을 쓰지 않은 사람은 노신 밖에 없을 것이다. 참고로 중국의 경우 원말청초부터 경극 작가들이 대거 출현했고, 작가들은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명기했다. 이런 차이는 동양 삼국 가운데 우리나라가 주자학에 가장 철저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요구한다.
 

  근대의 예술 교육 시스템이 전모가 아니라, 경학 이외의 삿된 글쓰기를 억눌렀던 유교적 문화 풍토가 초․중․고등학교의 교과목에서 희곡을 추방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유교적 경학에 빠져 의무교육의 교과목이나 대학의 예술 교육 시스템에서 희곡을 배제해도 괜찮다는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조영일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예컨대 희곡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의해 문자예술이 되거나 공연예술이 될 수 있는데, 만약 연극영화과와 같은 학과가 없었다면 아마 희곡, 시나리오도 문학 쪽에서 감당했을 것임에 분명하다.”(226~227쪽) 이 언명에 따르면 희곡은 연극영화과에서나 가르칠 것이지 국문과나 문창과에서 가르칠 게 아니라는 뜻이지 않는가? 그는 희곡을 대본 삼아 공연을 하니까 희곡이 공연예술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희곡은 엄연히 문자적 상상력이 투여되는 문학이다. 조영일 논리대로라면 베케트나 핀터에게 노벨문학상은 왜 주나? 아카데미상을 줘야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전 세계 어디에서도 희곡문학을 연극영화 분야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그리고 이건 사실관계 문제인데, 조영일이 몰라서 그렇지 우리나라 연극영화과에서는 희곡을 가르치지 않는다. 많은 설명이 필요하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정리하자면,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희곡이 천대 받는 것은 비평가까지나 된다는 사람이 희곡은 문학이 감당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경학중심주의에 있지, 조영일이 말하는 것처럼 교육(학과) 시스템만 원인으로 삼을 게 아니다.
 

  나는『구월의 이틀』에서도 그랬고, 실제로도 ‘20대가 지나면 소설을 읽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조영일은 거기에 대해 “문학은 20대에 읽고 던져버려야 할 것이라기보다는, 20대에 읽고 내던져야 할 문학이 있는가 하면, 평생 반복해서 읽어야 할 문학도 있다”고 반박한다. 나는 그가 말하는 원론에 토를 달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문학 작품을 그렇게 읽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문학은 20대까지만 읽으라’는 내 말의 방점이 20대가 지나면 ‘문학을 읽지 말라’에 있기보다, 20대가 넘으면 ‘독서의 폭을 넓혀라(진도 더 나가라)’에 있다는 것이다. 나의 이런 생각은 최상층에 소설과 시가 있고 가장 밑바닥에는 희곡이 있는 ‘장르(문학) 피라미드’ 밖에서 생각하라는 권고와 닿아 있다. 반면 조영일은 언제나 ‘장르(문학) 피라미드’ 안에서 사고하며, 피라미드 바깥을 상상하지 못한다. 즉 문단문학이니 장르문학이니 하는 설정 자체가 문학적 글쓰기에 갇혀 있는 그의 한계를 보여 준다는 말이다. 그런 뜻에서 조영일은 각종 르뽀에도 눈길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 밖에도「우익은 어디에」에는 내가 문단 바깥에서 고독했을 거라는 둥, 대학 강단에서의 실망이 『구월의 이틀』을 쓰게 했을 거라는 둥, 내가 “내 작품은 쓰레기이다(문명의 장식) 그러므로 다른 작품도 쓰레기이다”고 주장했다거나, 문학에 대한 나의 혐오가 급진성을 흉내 내는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등의 자질구레한 억측과 논점 이탈과 비약이 숱하다. 하지만 그런 작문에 대해서는 더 대꾸하지 않겠다. 대신 그야말로 천박하기 짝이 없는 그의 주장 하나만 더 지적하고 이 글을 맺고자 한다. 『구월의 이틀』에 나오는 한 등장인물(현대문학 교수)은 대학에 갓 들어온 신입생에게 “소년․소녀 가장이 아니라면 될수록 아르바이트는 하지”(142쪽)말라는 긴 당부를 한다. 조영일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아르바이트 따위는 그만 두고 청춘(구월의 이틀)을 즐겨라!는 것은 난로에 도시락을 데워먹던 시절에나 통하는 이야기이다. 장정일은 소년소녀가장이 아니라면 아르바이트 따위는 그만 두어라고 외치는데, 등록금이 지금 얼마나 하고 또 매년 얼마씩 오르는지를 알고 있다면 감히 그런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소녀가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즉 평균적인 수입을 버는 월급쟁이를 부모로 가진 학생이라 하더라도 등록금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지금의 현실이다. 까놓고 말해 등록금 걱정 없이, 그리고 용돈까지 타가며(즉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대학을 다니는 학생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30%를 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종이학을 접어 선물하던 시절에나 가졌던 ‘청춘’의 의미를 강조하며 학생(독자)들을 계몽하는 것은 확실히 냉소와 야유를 보내는 1,000여명의 자위대원들 앞에서 궐기를 촉구했던 미시마 유키오만큼이나 문학적이다.

 

  조영일은 내가 희곡 전공 초빙교수로 3년 동안 학생들과 만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동안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는 나의 관심사였고 고민이었으며 토론 주제였다. 다시 말해 조영일이 늘어놓는 현실론을 모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학은 학교․교수․학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공부를 해야하는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없다면 대학은 어떻게 될까? 학생들이 아르바이트 때문에 출석을 못하거나 리포트에 소홀할 때, 교수들은 공부보다 아르바이트를 더 중하게 배려해준다. 학생들의 아르바이트를 만류하는 시늉도 못하면서, 입만 떼면 대학이 죽어 간다고 말하는 교수들은 위선자들이다. 자신이 학비를 벌지 않으면 안 되는 딱한 학생은 어쩔 수 없지만, 소비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나 세상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학생들에게는, 그것보다 더 나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 한다. 청춘 시절이 아니면 다시는 청빈이란 고행을 맛 볼 기회는 오지 않는다.
 

  아르바이트는 체제에 대한 순응을 가르치는 교육장이자,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상력이 사전 제거되는 수술대다. 비싼 등록금은 학생들 개개인의 희생으로 해결 할 게 아니다. 학생들 개개인이 각개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회는 그 문제를 방기하게 된다. 그 뿐 아니라, 학생들이 값싼 시급을 받고 아르바이트 전선에 나설수록 명예퇴직이나 사업 실패로 막장에 몰린 부모들은 갈 데가 없다. 학생들의 아르바이트가 부모나 저임금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임금을 깎아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학생들의 아르바이트는 효과적인 체제 내화란 시점으로 비판돼야 하고, 아르바이트에 대해 더 본질적인 얘기를 하고자 하면, 반드시 효행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해야 한다. 아이들이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면, 부모들은 겉으로 만류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흐뭇해한다. 내 아이가 일찌감치 자본주의 법칙을 체득해 나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도 있지만, 효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자식을 자랑하고 싶어한다. 내 생각에 효는 받지도 주지도 말아야 한다. 국가가 지원해야 할 교육비를 학생들의 개별적인 아르바이트가 대신하고, 부모의 노후를 자식들에게 의지하는 구멍 뚫린 사회안전망에 우리는 관심을 돌려야 한다.
 

  매년 인상되는 등록금을 핑계 대는 탈수된 상상력과 자유기업원 직원처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복창하는 주제에 무슨 비평까지 한다는 말인가? 조영일이 이런 지경이라는 것을 학부형(가라타니)은 아시고 계실까? 학생들은 아르바이트가 체화시키려는 자본주의 체제와 다른 상상을 해보아야 한다는 내 주장으로부터 조영일은 미시마 유키오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멀쩡하게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이 체제와 다른 꿈을 꾸어 보겠다는 김예슬은 그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마침 조영일은 『문화과학』2010년 가을호에 기고한 어느 글에 이렇게 언급해 놓았다.

        얼마 전 한 여대생이 대학에 내건 대자보가 크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대자보에 대학답지 못한 오늘날의 대학을  비판하여 많은 공감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의문이 가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대학’이란 것 자체가 본래  그러한 시스템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

  지금의 ‘대학 내 경쟁의 격화’에 대한 비판은 고도성장기에 존재했던 여유로웠던 대학풍경(대학만 나오면 거의 다 취직이 되어서 애써 취직 공부에 매달릴 필요 없이 캠퍼스에 누워서 청춘을 즐길 수 있었던 대학풍경)에 대한 향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군대(국가)=학교(네이션)=공장(자본)이 잘 맞물려 돌아가던 시절 말입니다.

 

  그러니까, 김예슬의 자퇴 해프닝은 대학이 오늘처럼 경쟁의 격전장이 아니면서, 완전 취업이 보장됐던 고도 성장기에 대한 향수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저 말은 일반론일 수는 있지만, 김예슬이나 ‘김예슬 선언’에 관한 언급으로는 부당하기 짝이 없다. 그녀는 “군대(국가)=학교(네이션)=공장(자본)이 잘 맞물려 돌아가던 시절”로 돌아가자고 자퇴를 한 게 아니다.
 

  「우익은 어디에」에도 잠시 나오지만, 요즘 조영일은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여기저기 팔고 다닌다.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궁리,2008)에서 지식 유무로 타자와 나를 나누지 않고 앎을 권력으로 휘두르지 않아야, 나의 무지가 깨어질 수 있고 세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소중한 사례를 전한다. 그리고 그런 공부를 통해, 지식과 교습이 구조화 해놓은 불평등 사회를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더 큰 차이와 더 많은 독단(자기확신)을 갈구하는 입담가의 특성상, 그에게 ‘무지한 스승’은 입담을 위장하거나 원고를 매우는 데 긴요한 소재일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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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말 2011.07.22 00:2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장정일이 가라타니 쪼가리 때문에 소중한 시간 낭비하는거 같아 안타깝다...사실 그동안 다들 그냥 미친개이려니하고 무시하고 말았던 거지 에휴~~

  2. 국민작가 2011.07.22 00:30 Address Modify/Delete Reply

    가라타니 조의 '국민작가'는 신지식인 1호 심형래와 월드스타 비에 버금가는 코미디인데 ㅋㅋ뭔가 좀 변명이라도 해줌좋겠어 ㅋㅋㅋ그리고 정말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카프카 조이스 등은 몰랐던거야? 그런 병맛 주장을 ㅋㅋㅋ

    • 가라조 2011.07.26 00:53 Address Modify/Delete

      가라타니 조라고 하면 원조 가라타니 선생한테 똥물튀는 격이니까요, 앞으로는 줄여서 '가라'조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네요. 가라타니선생은 자기 번역자의 실체가 이런사람인줄 상상이나 하는지 모르겠어요.

  3. .. 2011.07.25 22:25 Address Modify/Delete Reply

    트위터에서 조영일이 올려놓은 링크를 타고 들어와 '댓글설전'을 먼저 읽고 -> '우익은 어디에..' -> '입담가를 위하여' 순서로 읽었다.
    장정일 작가, 쎄긴 쎄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조영일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건 뭐.. 거의 원펀치에 강냉이 우수수..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무척 좋아해서 열심히 읽어 왔는데, 요즘은 어디가서 가라타니에 대한 사소한 호감을 드러내는 일조차 망설여진다. 조영일의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

    • 가라조 2011.07.26 00:58 Address Modify/Delete

      똥가분을 비롯해서 조뽕달 옹호하던 우군들 정말 거짓말 안보태고 한마리도 안남기고 전부 버로우탔죠. 권투선수 복근처럼 탄탄한 글빨입니다, 장정일님.